신라인들의 ‘자유로운’ 성생활
근친간에도 혼인, 유부남·유부녀끼리도 ‘프리섹스’? 유력자에게 ‘색공(色供)’ 제공하기도
‘화랑세기’를 필사한 인물로 알려진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씨의 신라사(新羅史)에 관한 미완성 논문 ‘신라사에 대하여’가 최근 발견됐다. 일본 근·현대사 전공자인 한양대 강사 박환무씨가 계간지 ‘역사비평’ 봄호에 실은 이 논문으로 인해 근친혼과 동성애· 일처다부제와 같은 고대사회의 성풍속 논쟁이 다시한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신라인들의 성생활은 어떠했을까? 국내 대표적 신라학자의 기고를 통해 1500년 전 신라인들의 성 풍속을 살펴본다. /편집자
신라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신국(神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국에는 ‘신국의 도(神國道)’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신라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국사’에 나오는 신라의 모습이 실제의 신라와 같은 것일까?
예를 하나 들어보자. ‘신라의 젊은이’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화랑도가 떠오르지 않는가? 순국무사로서 화랑도상을 주입시켜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 한국 역사학은 국민을 만들기 위하여 화랑도 이야기를 왜곡한 것이다. 최근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을 보면 화랑도를 단순한 ‘순국무사’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신라에는 신라인들이 중시한 삶의 원리가 있었고 그들이 살아가는 도리가 있었다. 실제로 ‘화랑세기’를 보면 신라는 처첩을 분명히 구별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왕들도 정비(正妃)는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 여자들은 후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신라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신라인의 이야기를 찾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화랑세기’를 통하여 현재 한국인들이 놀란 그들의 성생활이 어떤 것인지 보기로 하자. 이를 위하여는 두 가지의 벽을 넘어야 한다. 하나는 일부일처제를 강조하는 기독교적 윤리나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조선시대 유교적 윤리라는 벽이다. 그 같은 윤리로는 신라인의 성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사정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22세 풍월주 양도공의 혼인을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양도공은 그의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누이 보량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동기간에 결합하는 풍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보량은 병이 생겼다. 이에 양도공의 어머니가 “신국(신라)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하(중국)의 도를 따르려 하느냐?”며 책망했다. 동기간의 혼인을 당연시하는 그러한 신국의 도는 기독교나 유교적 윤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이 신라였다.
또 다른 하나는 현대 자본주의의 벽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성이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1년 미국 국무부가 의회에 제출한 인신매매 보고서에서 최하위 등급인 3등급을 받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정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매매 화대가 24조원으로 2001년 국내총생산의 4.4%에 해당하는 금액이 된다. 이는 농림어업분야 총생산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20~64세 성인 인구의 20%가 월평균 4.5회 정도의 성 서비스를 구매하였으며 20~30대 여성 인구의 4.1%가 매매춘 사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현재나 신라시대나 성은 생활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현재 우리들이 숨쉬고 있는 한국의 성과 신라인의 성을 같은 잣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이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인의 성을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라인들, 성(性) 대신 색(色)이라 표현
그러면 신라인의 성은 어떤 것인가? ‘화랑세기’에서는 성(性)이 아니라 색(色)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도대체 신라인들에게 색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인의 눈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매매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사회다. 이와 달리 신라는 출생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골품(骨品) 사회였다. 신라인들은 골과 품으로 구성된 골품의 규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골품, 골품신분에 따른 차이는 엄청났다. 그 예가 있다. 33대 성덕왕은 716년 성정왕후를 출궁시킬 때 벼 1만석을 주었다. 성덕왕은 712년 김유신의 처를 부인으로 삼고 매년 곡식 1000석을 주었다. 신문왕 대에 왕은 강수의 처에게 조 100석을 주려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 지은은 쌀 10여석을 받고 자기의 몸을 부잣집에 팔아 비가 되었다. 왕비인 성정왕후는 1만석, 진골인 김유신의 부인은 1000석, 6두품인 강수의 부인에게는 100석의 곡식이 주어졌다. 그리고 백성은 10석에 몸을 팔았다. 이것이 신라 골품의 신분적 간격의 실상이다. 신라인의 색도 이와 같은 골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면 골품 사회 신라의 색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신라인의 색이 골품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현재는 화대를 지불하고 성을 사지만, 신라에서는 색을 가지고 골품을 구하였다. 여기서 신라인의 색공(色供)을 주목하게 된다. 색공은 색으로 받들다, 이바지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색으로 받드는 사람 즉 색을 바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골품이 낮았다. 구체적인 예가 있다.
10세 풍월주 미생랑은 일찍이 진흥왕의 아들이자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와 여색을 탐하는 어색(漁色)을 하러 다녔다. 그때 한 사람이 당두란 사람의 처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미생은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에 가서 그 처를 불러 관계를 가졌다. 태자가 죽고 난 후 미생은 그 여자를 첩으로 삼고자 집으로 불렀다.
그 여자의 남편인 당두는 미생의 누이 미실에게 찾아가 호소하기를 “아이가 아침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소연 했다. 이에 미실이 미생을 꾸짖어 그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그런데 여자가 미생을 잊지 못해 도망해 버리게 되었다. 미생은 당두가 다시 누이를 찾아 호소할까 염려했다. 궁리하던 미생은 당두를 관부에 천거하여 관리로 발탁하도록 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처에게 “미생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아양을 떨라”고 하였다. 후에 미생은 조부(調府)에 들어가게 되었고, 당두를 사부로 삼아 정치를 크게 바로잡았다. 왕은 당두에게 대나마의 지위를 주고, 조부 우경으로 삼았다. 조부는 국가의 재물을 관장하는 관부였다. 미생은 조부의 장관인 령이 되었고 당두는 차관인 우경이 되었던 것이다. 미생은 조부에 있는 동안 당두의 도움으로 누만금의 재물을 모았고 당두 또한 재물을 모았다. 당두의 처가 미생에게 색공을 바침으로써 당두가 관직에 나갈 수 있었고 재물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미생의 누이이자 10세 풍월주 하종의 어머니 미실은 왕에게 색공을 하였다. 진흥왕은 미실을 몹시 아꼈다. 그는 미실을 한 번 사랑하고 두 번 사랑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진흥왕은 미실과 그의 남편 세종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 하종을 전군(殿君)의 지위에 봉하기도 하였다. 전군은 왕의 후궁이 낳은 아들로 왕궁에 전(殿)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지위였다.
하종은 왕의 사자(私子)가 아니었는데도 미실이 왕에게 색공을 하였기에 전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실은 왕에게 색공을 함으로 황후궁 전주가 되었는데 그 지위가 황후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미실도 색공을 통하여 그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관계’로 생긴 아들은 ‘마복자’라 불러
신라인의 색은 사회·정치적 기능을 아울러 갖고 있었다. ‘화랑세기’에 나오고 있는 마복자가 그것이다. 골품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의 임신한 아내와 관계를 가질 경우, 그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을 신라인들은 ‘마복자’라 하였다. 현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윤리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골품 사회인 신라에서는 마복자가 오히려 사회·정치적 기능을 가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낭두란 직위가 나온다. 낭두는 화랑·낭도와 함께 화랑도를 구성하는 3가지 요소의 하나였다. 화랑이 장교라면 낭두는 현재 군대의 준사관(하사관), 낭도는 사병에 해당한다. 그 중 낭두는 상랑과 상선의 마복자가 아니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상선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역임한 자를 말하는 것이고, 상랑은 화랑을 지낸 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라에서는 낭두의 처들이 임신하면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선문(仙門; 상랑·상선 등이 머물던 곳)에 들어가 몇날 또는 몇달 간 머물렀다. 이들은 상랑이나 상선의 총애를 얻으면 물러나곤 했는데, 그 때 남편들은 예를 갖추어 이들을 맞이하였다. 이를 ‘사함’이라 하였다. 아들을 낳은 지 석 달이 되면 다시 선문에 들어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삼았다. 이를 ‘세함’이라고 하였고, 다시 몇 날이나 몇 달 만에 총애를 받으면 물러났다. 그 남편은 또 사함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그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이 것을 입망의 법이라 하였다.
한편 경박한 여자는 선문에서 놀고자 거짓으로 임신을 칭하고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일부에서는 임신이 안 될까 염려하여 선문의 예졸과 사통하거나 혹은 상선·상랑의 아이를 임신하여 돌아가니 폐단이 심하였다고도 한다. 풍월주 양도공 때에 이르러 비로소 입망의 법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했다고 한다.
한편 신라에서는 왕들도 마복자를 가진 예가 찾아진다. 21대 비처왕(소지왕)에게는 마복7성이 있었다. 그들 7명의 마복자 중 후에 왕위에 오른 법흥은 7성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진흥왕에게 색공을 하여 왕궁에 살며 전주가 되었던 미실은 동륜태자의 죽음과 연루되어 출궁된 적이 있다. 그 때 미실은 남편 세종과 관계에서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런데 미실을 잊지 못한 진흥왕이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에 미실은 아이를 임신한 지 수개월이 되었기에 해산한 뒤 입궁하겠다고 하였으나 진흥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미실이 입궁하여 옥종공을 낳았는데 왕은 그를 마복자로 삼은 바 있다.
왕의 마복자들은 왕과의 관계로 인하여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의 마복자는 왕이나 상랑·상선 등의 도움으로 사회·정치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이나 상랑·상선들은 마복자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결국 신라인들의 마복자 관계는 색의 사회·정치적 기능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골품 사회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마복자를 현재 우리들이 갖고 있는 윤리와 어긋난다고 하여 ‘패륜적 관계’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신라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방증이 된다. 신라인들에게 색(色)은 단순한 생리적 기능이 아닌 사회·정치적 기능이었음을 아울러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신라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신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신라는 신라인 그들의 왕국이었다. 신라인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는 현대 한국사학에서는 하나의 숙제이자 풀기 어려운 암호다. 현대 한국사학이 발명한 신라 역사의 틀을 벗어나 그 안에 나오는 신라 이야기를 해독하여 나가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룬 신라인의 색은 그 한 예가 된다.
‘화랑세기’는 화랑 32명의 전기
‘화랑세기’는 540년부터 681년까지 화랑들의 우두머리 화랑이었던 32명 풍월주의 전기다. 원래 오기공이란 사람이 화랑의 세보를 작성하였는데, 그 아들 김대문이 파맥의 정사를 더하여 ‘화랑세기’를 저술하였다. 저술 시기는 681년에서 687년 사이였다.
‘화랑세기’의 실재 여부는 미스터리다. 1923년 일본 도쿄로 이주한 박창화가 일본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옮겨 적은 필사본이 발견된 바 있다. 박창화는 1945년 이후 한국에서 자신의 필사본을 줄여 발췌본을 만들었다. 그러나 원본 ‘화랑세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어디인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화랑세기’는 문화적 충격이다. 근·현대 한국사학을 신봉하는 연구자들에게 그들이 진실이라 여겼던 신라의 기술과 다른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이 책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화랑세기 위작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성관계·근친혼을 들어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조정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신라는 출생에 의하여 사회·정치적 지위가 결정되는 골품 사회였다. 이 책에 나오는 근친혼·색공 등은 그 시대의 제도가 낳은 산물이다. 그러한 혼인이나 남녀관계의 기록이 없다면 이 책은 신라인의 저술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박창화가 쓴 1945년 이후 여러 종류의 책이 위작이기에 ‘화랑세기’도 위작일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박창화의 여러 책들을 사료로 모두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필사본을 처음 만났던 연구자도 5년 동안이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고민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화랑세기’는 박창화의 여타 기록과는 다른 책이다. 기본적으로 잘못된 곳을 찾을 수 없다. 준비하고 있는 자만이 ‘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 책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 책의 이야기와 같은 신라의 역사를 추적해 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필자는 누구보다 먼저 ‘화랑세기’의 본질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기존의 학자들이 얼마나 엉뚱한 시각으로 신라를 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화랑세기’가 출현한 지금은 신라 연구의 틀과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발문) 신라인의 성(性)은 사회·정치적 기능을 아울러 갖고 있었다. 골품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의 임신한 아내와 관계를 가질 경우, 그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을 ‘마복자’라 부르고 우대해 주었다.
이종욱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