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 레] 2003-02-28 () 27면 3292자
2000년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며 ‘커밍아웃’을 한 뒤 사람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져 간 탤런트 홍석천(32)씨. 그가 3년 만에 인터넷 라디오 〈라디오 21〉 ‘홍석천·이민정의 커밍아웃’(월~금 오후 4시5분) 메인 진행자로 다시 돌아왔다. 언젠가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을 가진 그가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대안 방송에 자리를 튼 것은 또 한번의 ‘커밍아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띄우는 편지글로 옮긴다.
오랜만이에요, 다시 한번 용기를 냈어요.
안녕하세요? 홍석천이에요. 참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저도요. 방송국 주변도 기웃거리고, 나이트 클럽 디제이도 하고…. 아! 그리고 요즘엔 새로 연 식당 때문에 장보는 일이 하나 더 늘었네요. 불안정했지만 후회는 없었어요. 커밍아웃을 하고 3년여 만에 처음 제 이름을 단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게 돼 무척이나 설레고 들뜨네요. 바로 몇 주 전에도 한 방송사로부터 ‘거부감’ 때문에 또 한번 퇴짜를 맞았거든요. 스스로 잘 견딘다 싶다가도 한번씩 이런 일이 생기면 힘이 쭉 빠져 버려요. 하지만 부담도 돼요. 지난 1월 초에 평소 알고지내던 라디오21 김갑수 대표가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방송을 하려는데 너 한번 해볼래” 하기에 능력은 생각도 않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덥석 “하죠” 했는데…. 사실 언젠가 ‘주류’ 방송 복귀를 기다리는 제게 용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마음 한 구석엔 솔직히 ‘폼 안나는’ 인터넷 라디오라고 좀 쪽팔리기도 했죠. 어쨌든 저같이 세상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 겁도 없이 호랑이 굴에 뛰어든 건 아닌가도 싶어요. 이 프로그램이 동성애자부터 장애인, 여성 그리고 혼혈아 등 차별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것이잖아요.
그렇지만 지난 3년 동안 저도 많이 늘었어요. 커밍아웃 뒤 연예계에서는 저를 불러주지 않았지만 대신 노동자, 대학생, 성폭력 피해 여성 등 예전의 홍석천이라면 평생 마주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분들이 저를 불러줬죠.
소수자요? 우리가 다 소수자 아닌가요?
사실 저도 아직 제 프로그램에 초대받는 노동자, 장애인, 혼혈아, 실업자 분들을 만나기 전에는 뭔가 무섭고 긴장도 돼요. 하지만 막상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요. 사회가 그들이 처한 상황에 편견이라는 올가미를 씌우고 차별하는 것이죠. 생김생김이 다르다고, 돈을 못번다고, 팔다리가 불편하다고, 성적 취향이 다르다고 그들의 인간성과 능력까지 재단하는 거지요. 그리고는 이 사회의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죠. 정말이지 소수자들은 평생을 애타게 준비만 하다, 기회만 기다리다 보내게 돼요. 사실 우리는 모두 이미 소수자이거나 잠재적인 소수자 아닌가요? 갑자기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어느날 문득 동성이 좋아질 수도 있고….
너 차별이야? 난 네게 지고 싶지 않아.
저도 커밍아웃을 하기 전에는 잘나가고 당당한 주류였어요.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소수가 되는 것은 정말 순간이에요, 순간. 제가 3년 동안 느낀 것이 있다면 “잘못된 사회적 시선을 딛고 내 입으로 원하는 걸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커밍아웃 직후 방송에서 내쫓기고 일을 잃었을 때 스스로 체념해서 제 권리를 요구하지 못한 것이 지금은 후회되네요. 저와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편견이나 차별은 당하는 사람 쪽에서 ‘그래 내가 한번 참아주자’고 하면 기고만장해서 기어오르려는 고약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에요. 저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난 너에게 무릎꿇고 싶지 않아. 네게 지고 싶지 않아. 내가 널 이길거야”라고.
말이 길어졌네요. 모쪼록 제 방송을 통해서 ‘차별받는 우리 다수’가 가슴속에 눌러뒀던 아픔이나 한들이 조금이나마 아물었으면 해요. 많이 들어주세요~.
2월 28일 새봄을 기다리며 홍석천 올림.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21일 개국한 ‘라디오 21’은
외국인 노동자·스타 아줌마 진행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눠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가 진행을 맡아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운동권 인물들의 일대기가 펼쳐지며 ‘철의 노동자’와 ‘바위처럼’ 같은 민중가요가 내내 방송을 타고 흘러나온다?’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라디오가 인터넷에서 우리의 귀를 끌어당긴다.
지난 21일 차별 철폐와 새로운 대안 문화 확산을 내세운 인터넷 라디오 방송 〈라디오21〉(radio21.co.kr)이 개국했다. 라디오 21의 주축은 김갑수 대표를 비롯해 문성근, 명계남, 유시민씨 등 지난 16대 대선에서 ‘라디오로’(노무현 라디오 방송)에서 활약하던 이들이다. 김갑수 대표는 라디오21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놓인 노무현이라는 작은 징검다리를 튼튼하게 하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다리를 놓으려는 진보적인 사람들의 토론과 공론화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라디오 21은 24시간 종일 방송 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긴 방송시간이 괜한 과욕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말고도 탤런트 홍석천, 음악평론가 강헌, 가수 이정열씨 등 지상파 라디오들도 섭외하기 어려운 쟁쟁한 진행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김 대표가 발로 뛰며 ‘싼값’에 흔쾌히 승낙을 받아낸 사람들이다. 〈라디오21〉은 시청률 논리로, 또는 상업적 논리로 밀려난 진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야심만만한 반역을 꾸미고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가 직접 진행을 맡은 ‘이주노동자의 보이스(목소리)’(일 오후 4시)와 스타 주부 최윤희씨가 진행하는 ‘순 아줌마 시대’(토·일 오후 2시)가 눈에 띈다. 이주노동자의 보이스는 1994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네팔인 노동자 서머르 타파가 직접 진행을 맡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코리안드림’이 어떻게 차별과 고통으로 처참히 깨어졌는지가 ‘당신들의 대한민국’ 꼭지에서 소개되고 그들이 가고픈 고향과 듣고픈 노래가 ‘나의 가족, 나의 고향’, ‘아름다운 노래’에서 이어진다.
순(soon) 아줌마 시대는 찬밥 신세인 아줌마들이 속시원한 화풀이로 ‘곧 올’ 아줌마 시대를 노래한다. ‘불가마 토크’, ‘그래, 밥하고 나왔다’ 등 꼭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이 밖에도 이인영, 임수경, 임종석, 김민석 씨 등 80, 90년대 운동권들의 이야기를 다큐라마(다큐멘터리+드라마) 형식으로 소개할 ‘투사열전’(월~금 오후 2시), 재미있는 민중가요 프로그램을 표방한 ‘이정열 손병휘의 심야방성대곡’(월~금 밤 0시10분), 100% 청취자 참여로 엮어질 ‘라디오 해방구’(일 오후 1시) 등도 놓치기 아까운 프로그램들이다.
‘역사를 생중계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실험이 막 시작됐다.
성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