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1-11-22 (특집) 기획.연재 12면 10판 4691자
[세계 지식인 지도] 제7부 6. 테크노사이언스 여전사 도나 해러웨이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샌타크루즈 소재)의 의식학과(History of Consciousness) 교수다. 기념비적인 저서 『영장류의 전망』(1989년)과 고전의 경지에 이른 에세이 『사이보그 선언문』(91년)을 통해 지식의 형성과 과학.문화비평에 대해 독특한 사유방법을 제시했던 그녀는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 및 사이보그 인류학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과학 지식의 형성에 반영되는 메타포와 그런 메타포가 지식을 만들어 내는 힘의 네트워크에 미묘하게 작용하는 인식론에 관해 해러웨이는 '위치지워진 지식(situated knowledge)'모델을 제안했다. 그녀의 '위치지워진 지식' 모델은 객관성.실재론.사회구성주의 과학관의 절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식 모델에서 해러웨이는 자연의 실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은 구별할 수 있고,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현상의 물질적 분석과 이를 둘러싼 문화적 분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해러웨이의 '위치지워진 지식' 모델은 그녀의 저술 전반에 흐르는 이론적 패러다임이다.
『사이보그 선언문』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결합한 풍자적인 정치신화를 고안한 해러웨이의 역작이다.
그녀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재편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정체성을 주장하였고, 그 정체성의 중심에는 사이보그가 있다고 말한다.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인 사이보그야말로 생명과 기계,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없어져 버리는 미래 우리들의 모습과 존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기계인 컴퓨터의 관계를 보자. 오퍼레이터는 기계에 명령을 내리고 기계는 오퍼레이터의 일부처럼 그 명령을 수행하는 관계에서는 만드는 자와 피조물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또한 우리는 독립적으로 동작하는 기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네트워크에의 접속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 네트워크 안에서는 무엇이 정신이며 무엇이 육체인지 그 경계 역시 분명치 않다. 바꿔말하면 기계와 유기체,기술적인 것과 유기체적인 것 양자 사이에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분리는 없다.
따라서 과학기술 발전에 힘입은,물리.비물리적인 경계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사이보그의 출현은 기존의 현실세계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했던 인종.젠더(性).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범인류적인 보편성을 지닌 심상이며 미래사회의 희망이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녀는 사이보그 이미지를 흑인 및 아시아계 여성을 포함한 비(非)백인 소수파 그룹의 유색 여성에게서 발견하였으며 그들은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서구의 반식민주의적 담론의 근거를 해체할 수 있는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사이보그 이미지는 다분히 급진적이다. 노동의 특성을 성별 분업에 따른 기능주의적.생물학적인 성과 섹스로만 이해했던 급진적 페미니즘은 물론, 노동력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입장을 분석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미래의 사이보그는 특정한 누구를 선별적으로 소외하거나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탈성차사회(脫性差社會)'의 근간이 된다고 해러웨이는 강조한다.
현재 진행중인 제2의 과학혁명(분자생물학.양자역학.상대성이론 등으로 대변되는 20세기 과학혁명)과 제3의 산업혁명(정보통신 혁명과 탈산업화 혁명)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 신지식인과 노동계층은 사이보그 사회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대다수 여성들의 정치적 이미지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다국적 기업들이 제3세계의 여성 노동력을 노동자 수급의 대상으로 선호한 결과, 유색 여성과 소수파 여성들은 비전문 숙련직에서 고용의 기회를 갖게 되면서 생산.문화.소비의 주축이 되고 있다.
미래 기술력 시대의 여성의 역할은 과거 남성과 여성, 자연과 문화의 이분화에 내재했던 위계질서의 간극을 넘은 사이보그 사회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해러웨이는 젠더.소유권 및 다른 분석 범주 등과 같은 분석틀을 '고정된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 것을 경고한다.
해러웨이의 페미니즘 과학학의 주장은 급진적이다. 그녀는 반(反)과학의 입장을 주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 과학, 객관성 과학에 기초한 시민과학의 조성을 주장한다. 과학기술이 지속가능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그녀는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사회야말로 미래 사이보그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가교라고 보았다.
테크노사이언스 사회의 비전은 인식주체인 행위자와 객체인 비물질 행위자간의 연대감이 이루어지는, 모든 성원에게 부합되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테크노피아의 구현이라고 그녀는 강조한다. 한마디로 테크노사이언스 사회란 인간의 평등, 풍부한 물질세계 구현, 자기비판적 지식, 물질적 부의 분배, 환경친화적 세계, 생물다양성과 종의 보존 등이 어우러진 곳이다.
이를 위해 해러웨이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평가에 시민사회의 여론과 과학자의 전문적 고견이 수렴되는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같은 모델을 제안한다.
아울러 그녀는 테크노사이언스 사회에서는 자신이 고안한 '위치지워진 지식'모델과 일군의 페미니스트 과학자들이 믿는 객관적 과학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해러웨이는 복잡다단한 과학기술의 세계에서는 참지식의 획득과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는 테크노사이언스 세계를 살아갈 돌연변이 같은 '진리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봤다.반인종주의자.페미니스트.다문화주의자.급진적 과학운동의 사도로서 해러웨이는 바로 이 돌연변이 같은 증인이 다름 아닌 사이보그라고 보았던 것이다.
정혜경 포항공대 연구교수.과학사 <hgeong@postech.ac.kr>
***도나 해러웨이 약력
▲1944년: 미국 콜로라도 텐버 출생
▲60년대 예일대 박사(생물학)
▲70~74년: 하와이대 생물학·과학사 강의
▲80년대 존스 홉킨스대에서 생물학·과학사 강의
▲현재 캘리포니아대(샌타크루즈 소재) 의식학과 교수(과학사)
*저서
▲영장류의 전망(Primate Vision : Gender, Race and Nature in the World of Morden Sciencer·89년)
▲사이보그 선언문(Simians, Cyborgs,and Women : The Reinvention of Nature·91년)
▲진리의 증인(Modest_Witness@Second_Millennium : Femalemanⓒ_Meets_Oncomouse : Feminism and Technoscience·96년)
■페미니즘과 과학
1970년대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과학학(Science Studies.과학과 유관한 총체적인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은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대부분의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지식의 산물을 이해하는 데 과거 19세기에 팽배했던 실증주의보다는 사회적 역동성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 자체에는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반면 과학학의 인접분야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자세를 취할 뿐 아니라, 특히 페미니즘 과학학의 주장에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과학학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과학사가인 론다 쉬빙거는 페미니즘 과학(기술)학의 동향을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역사상 무시되어 왔던 여성과학자들의 위상을 복원시키는 연구, 둘째 과학제도의 발달에서 여성을 배제해 왔던 역사적 이유를 규명하는 연구, 셋째 과학지식의 성적 구성과 '성과학'의 이데올로기를 규명하는 연구. 넷째 과학실험과 실천의 규범 및 방법에서의 남성중심적 과학관의 규명이다.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은 다양한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는 과학의 전통적인 인식론을 공격하고 있다.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객관적 지식으로 가치중립적인 순수한 객관적 진리를 확신한다고 여겨져 왔다.
이에 대해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은 남성중심적인 과학의 지식에 여성의 경험을 포함함으로써 객관성 과학을 추구할 수 있다고 봤다. 그들은 전통적 실증주의에 근거한 엄밀한 과학방법이 아니라 인식주체의 관점과 입장까지를 포괄하게 되면 과학과 자연을 더욱 더 잘 볼 수 있어 매우 강한 객관성을 띨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하러웨이에 버금가는 페미니즘 과학학자인 에블린 폭스 켈러는 유전학자인 바버라 매클린톡의 전기에서 "매클린톡의 성공적인 과학은 당시 남성 주도적인 유전학자 사회가 주장했던 편협한 방법을 넘어서서 탈성차(脫性差)의 접근을 시도한 점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매클릭톡은 유전자가 유기체를 결정한다는 남성들이 주도한 유전학의 방법과 원리를 넘어서,옥수수의 변이를 유기체와 유전자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독특한 관찰방법으로 '점핑유전자(jumping gene)'라는 가설을 제창해 오랜 무시 끝에 1983년 노벨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사회학의 지면에는 페미니스트들의 의식이 결여돼 있거나 지나치게 남성우월주의 수사가 넘쳐나고 있다.
여전히 과학사회학자들과 노선상의 차이를 보이는, 고립된 듯한 페미니즘 과학학의 위상은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
그런 고립도 전통적으로 남성 주도의 과학의 세계에서 소외받은 여성과학자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물론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만이 과학의 인식론을 개혁하려는 유일한 그룹은 아니다. 과학사회학의 노선에 회의적인 많은 학자들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부정과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틀의 모색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혜경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