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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펌] 아줌마, 번지 점프하다.
    Freeboard/Everydays 2003. 5. 27. 06:54
    그녀, 번지점프하러 가다
                               ..이 만 교



    산다는 게 무엇일까?
    냄새 지독한 남편의 양말 한 짝을 손에 쥐고
    그녀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조차도 자신이
    냄새나는 양말짝을 손에 쥐고서 인생을,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 전만 해도 깊은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땐
    모카향 커피를 따라 마시거나 밤기차로
    겨울바다에 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좁은 집구석이 그 어느 겨울바다보다도 더 넓고 막막하다.
      
    인생에 대한 생각 때문에서라기보다는
    양말 한 짝을 마저 찾으려고 침대 밑과 장롱 뒤로 얼굴을 집어넣다 보니
    정작 찾아야 하는 건 양말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녀의 시야를
    갑자기 양말의 비린내 냄새가 코를 덮치듯
    덮쳐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겨울바다만 가면 늘 하던 버릇대로
    넋을 놓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곤 세상 바깥 저 너머를 내다보는 듯한 멍한 눈으로
    화장대 손거울을 가져다
    들여다봤다.
      
    쥐구멍만한 손거울 속에는
    매우 늙어 버린 여자 하나가 자신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 손거울은 차라리 친정 엄마 사진이었다.
    겨울바다에만 가면 전신으로 느껴지던 그 쓸쓸한
    세월의 바람소리가 그 늙은 여자의 눈시울과
    허파 속에 고여 출렁거렸다.
      
    간혹, 옆집 여자들과 수다를
    떨어 보기도 했다.
    양말을 벗어서는 아무 데나 쑤셔 박아 놓는 남편에 대하여.
    잠을 자도 꼭 텔레비전을 켜 놓고 코를 골면서 자는 남편에 대하여.
    주식과 스포츠 뉴스와 피로밖에 모르는 남편에 대하여.
    다른 여자도 깔깔대며 맞흉을 봤다.
    ―베개를 끌어안고 자는 줄 알았는데 이불을 들쳐 보니 그게 그이 똥배지 뭐예요.
    그러나 그녀들은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되자 정확히 일어나 돌아갔다.
      
    그제야 그녀는 이렇게 모여 앉아
    남편 흉이나 보며
    여생을 견디는 게 자기에게 남겨진 일생이란 걸 알았다.
    남편 흉과 신세한탄이야말로 하릴없는 아줌마가 자신을 하릴없는
    아줌마로 완성시키는 마지막 절차라는 걸.
      
    남편이 돌아와
    양말만 쿡 처박아 놓은 채 발도 씻지 않고
    텔레비전 앞에 드러누워서 밥 줘, 하고 말했을 때 그녀는 드디어
    차려 먹어! 하고는 옆방으로 가서
    인생에 대해 생각하느라 고단해진 머리를
    자기 무릎 위에 그릇 포개듯
    올려 놓고 앉아 울었다.
      
    그때 남편이 따라와 말을 걸었더라면
    한바탕 싸울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남편은 주식 동향과 스포츠 뉴스가 끝난 다음에야
    몰래 다가와
    (그녀는 그의 발 냄새 때문에 그것을 금새 눈치챌 수 있었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며 간질러댔고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지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보다 나은 인생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간지럼을 잘 견뎌야 한다, 고 가르쳐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그만 까르르, 웃고 말았다.
      
    어머니만 웃어 버리면 세상은 얼마나 화목한가.(―하고 그녀도 어릴 때 엄마가 짜증내면 생각하곤 했었다.)
    딴에 불안을 느꼈는지 눈알만 뒹굴리던 세 살바기 딸년도
    배시시 예쁜 웃음으로 달려들지 않는가.
      
    모든 세월은
    인내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히 폭발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은 인내하는 그 당사자만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렇게나 살아도 세월은 잘 흘러가는군, 하고
    생각하다가, 심지어 나중엔 그래도 자기가 잘했기 때문에
    이만큼 우리 가정이, 우리 회사가, 우리 모임이
    잘 흘러 왔지 않냐고 자부한다.
      
    그 염치없는 자부심을 반박하기 위해선
    인내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폭발해 버리는 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결국 이승에서는 더 사랑하는 쪽이 인내하고 용서하며
    그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함까지 맛보며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그날 남편의 밥상을 정성껏 차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의 어깨까지 주물러 주었다.
    하, 어리석은 이 남자는
    그걸 무슨 신호로 받아들이곤 그날 밤,
    그녀 배 위로 올라와 되지도 않는 힘을 쓴답시고 낑낑댔다.
      
    사는 게
    왜 이 모양일까!
    낑낑대는 남편을 배 위에 올려 놓은 채로
    그녀는 생각했다.
      
    어떤 의무감에 시달려 낑낑대는 가여운 남편을 배 위에 올려 놓곤
    아, 아, 아, 거짓 교성을 내지르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괴롭고 허무하고 우습기까지 한,
    그리고 나중엔 아주 약간이나마 어떤 자극이 느껴지는 것도 같아서
    그녀는 엉덩이에 힘을 주긴 주었다.
    주먹 쥐듯 엉덩이에 힘을 주었고
    남편은 나가떨어졌다.
      
    그리곤, 그제야, 어쩌면 오늘이 그날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경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 인간이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세상의 어리석은 남편들은 아빠가 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사타구니를 씻다 말고
    그녀는 몸을 웅크려 물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욕조는 자궁 속처럼 좁고 고요했다. 그녀는 그 속에 얼굴을 박고,
    (양말짝을 손에 들거나, 낑낑대는 남편을 배 위에 올려 놓은 자세가 아닌)
    차라리 그런 자세로, 인생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부력 때문에 그녀의 엉덩이만이 수면 위로
    불룩, 나와 있었다.
      
    마치, 거기 어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구멍이라도 있어
    그리로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다 자신의 엉덩이를 까 내밀어 보인 채
    그녀는 고집스럽게 얼굴을 박고는
    처음으로 인생을, 다른 인생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욕조 속에서.
      
    그러자, 생각지도 않은 동작에서 생각지도 않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듯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번지점프가,
    번지점프를 한번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마치 남편 몰래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녀의 내복을 이것저것 갈아입어 보았다.
    만약 사고라도 나서 죽게 된다면, 하고 상상해 보니까 내복만큼은
    예뻐야 할 것 같기에 그녀는 가장
    야한 것으로 골랐다.
      
    다음날, 딸애를 옆집에 맡기고
    찡기는 내복을 입고 걸어나가자니 참으로 오랜만에
    연애하러 가던 옛날 기분이 되살아났다. 좀더 젊어 보이려고
    처녀 때 옷을 찾아 입은 탓에
    그녀의 몸뚱이는 가죽 소파처럼 탱탱했다.
      
    그 동안의 그녀야말로 살찐 소파처럼 안락하기만 했던 것이다.
    때론 세탁기나 밥솥도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조절했으면 싶었다.
    동시에 그녀야말로 남편과 딸에게는
    기대기 좋은 소파이자
    심부름시키기 좋은 리모컨이었다.
    늘 같은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응석을 받아 주길 바란다는 점에서
    그들은 그녀를 정말 푹신한 소파쯤으로
    여기는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가 아무 말도 않고
    집을 비웠으니 남편은 그녀를 의심하며 제3의 인물을
    상상해 볼 것이다. 어떻게 살찐 소파가 혼자 걸어나갈 수 있겠는가.
    완고한 시댁 식구들은 이 사건을 두고
    살찐 소파가 혼자
    걸어나간 경우보다도 더 경악하리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이런 외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침 햇살을 보면 세탁기를 돌렸고
    노을이 보이면 저녁밥을 서둘렀다.
    그녀에게 있어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세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맞춰 물건을 사는 것이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어떡해서든 전철의 빈자리에 찡겨 앉아 갈 수 있는 행운이라든가
    지갑과 쇼핑 꾸러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귀가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 가는 중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떨이로 산 싸구려 과일이
    의외로 맛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자기의 선택에 대만족하는지는
    그녀 남편도 눈여겨봐 왔으리라)
      
    그런 그녀가,
    다른 사람의 칫솔조차
    반드시 정해진 위치에 놓여 있어야 안심하던 그녀가,
    겁도 없이 까닭도 없이 혼자 삼십 미터 상공에 올라가 뛰어내리려 하다니
    그녀 자신조차도
    사실은 진작부터 불안해져서는
    이제 겨우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었을 뿐인데도
    누군가 어깨라도 부딪치면
    마치 삼십 미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 모양 놀라
    화들짝대는 거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버스가 출발하려 하자 그녀는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집에 돌아가,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하고
    짜증 부릴 남편에게
    슈퍼 갔다 왔어, 하는 식의 범상한 말투로
    번지점프하고 왔어, 하고 말한 뒤에
    남편이 지어 보일 그 맹한 표정을 구경할 생각을 하니
    그만 그 표정을 구경해 볼 욕심에서라도 꼭 해내고야 말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결코 고지식한 남편의 놀라는 표정을 보자고
    번지점프를 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경악하는 그이의 표정을 보려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시장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번
    추스려 보고 싶었다.
      
    삼십 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릴 때 얻어지는
    그 긴장감으로,
    흐트러진 자신의 인생을 어떡해서든
    다시
    추슬러 세우고 싶었다.
    그러다 사고라도 나서 죽으면? 하고 어디선가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더라도 상관없어! 그녀는 남편에게 신경질내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저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그래서 지나고 나면
    하루쯤 없었어도 상관없을 그런 날들의
    연속일 바에야,
    오래 산다고 많이 사는 건 아니잖아!
    (한때는 그녀에게도 스물아홉 살까지만 살아야지, 하던
    이십대가 있었다)
      
    ……
    모든 걸 뿌리치고 마침내 그녀는 점프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올라서자 아찔했지만
    까마득했지만,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그녀로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순간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시는 번지점프 따위를 하러 오지 않겠다는 사실이었다.
      
    땅 위에 몰려 서서 구경하는 개미만한 인간들이 눈에 잡히자
    이것들아, 네놈들 신세가 지금 얼마나 안락한지
    알기나 하는 거냐, 소리쳐
    말해 주고도 싶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하면서
    한편으론 너무 찡긴 옷을 입고 나온 바람에
    줄이 당겨질 때
    바지가 찢어지는 건 아닐까,
    그녀는 뛰어내리는 순간에도 혹시나 걱정이 되어
    엉덩이에 바짝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맞은편 하늘에 유유히 떠가는 흰 구름을 한번 응시한 다음,
    십자성호를 엉터리로나마 그어 본 다음,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로 자신의 전신을
    단호히 공중에
    내어 던졌다.
      
    아아아…
      
    땅에 내려선 뒤에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턱이 떨렸다. 이건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가까운 스낵바에
    가 앉았다. 그리곤 그때까지도 널뛰는
    자신의 심장을 달래느라
    냉커피를 시켜 놓고도 후후, 불어 가며 마셨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들판 너머로 까마득히 지는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제야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사는 것, 이것 참으로 넌덜머리나게 외로운 것이라고
    그녀는 울면서 노을 바라보다
    그래도 찡기는 처녀 때 옷이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쿡, 한번 웃고는
    또 울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곳까지 갔다 구사일생 돌아왔건만
    아파트 광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놀이터의
    아이들 노는 소리로
    평화로웠다.
      
    게다가 지금쯤
    울어대는 딸애를 안고
    아내의 묘연한 행방을 찾아 나섰겠지, 싶었던 남편은
    아직 귀가도 하지 않은 채라는 걸, 잠긴 현관문을 통해 확인한 그녀는
    묘한 배신감에 허탈감까지 느껴야 했다.
      
    옆집에 맡긴 딸애를 찾으려다 말고
    그녀는 몰래 뒷걸음질쳐(들킬까 봐 다시 심장이
    벌렁댔지만) 아파트를 빠져 나와
    공터에 가 앉았다.
    남편과 싸우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베란다로 나가 멍하니 바라보던 바로
    그 공터였다.
      
    가로등이 있었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산수유나무 그림자에 가려서 자세히 봐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저녁 찬바람이 그녀의 빈 가슴을 휑하니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녀는 자신이 투명인간이거나
    죽은 영혼이 되어 버린 기분으로 자신의 불꺼진 집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어디로부터 출발했는지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아주 길고 긴 세월의 바람이
    그녀가 앉아 있는 벤치를 지나 어딘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미지를 향하여 빠르게
    빠져 나가고 있었다.
      
    담배를 한 대 꺼내 태웠다.
    그리곤 생각을 바꿔 집으로 들어가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상을 차렸고
    심지어는 남편에게 양말 좀 세탁기에 벗어 놓으라며 약간의 잔소리까지
    평소대로 늘어놓았다.
      
    남편이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는
    그러나 긴장을 늦춰선 안 되었다. 자꾸만 ―있지, 나 오늘…하면서
    간살맞은 혀가
    그녀를 배신하려 들었으므로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남편의 간지럼을 참는 것만큼이나 힘이 들었지만
    오늘따라 야구중계에 정신이 팔린 남편은
    그녀가 장난 삼아 ―오늘은 번지점프라도 한 것처럼 피곤하네, 하고 말해 봐도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남편이 잠들고 나서야
    겨우 그녀만의,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비밀 하나가
    생긴 사실에
    그녀는 안심하고 환호작약했다.
      
    돌이켜보면
    연애 때 거의 반강제다시피 남편에게 순정을 빼앗기고 나서
    처음으로, 그녀만의 비밀이
    새로
    생긴 거였다.
      
    하도 졸라대기에 ―키스만이야? 하니까 ―응, 알았어,
    하고는 불을 끄더니 나중에 불을 켜고는 물었다.
    ―하니까 좋지? 당신이
    매사에 신경질적으로 굴 때 나는 그것이
    호르몬의 과잉분비에서 나오는 히스테리임을 알아챘지!
    남편은 그녀가 아파서(좋아서가 아니다) 혼절하는 중인데도 농담을 하며
    또다시 천천히 즐겼다. (그때는
    그 정도로 힘이 좋았다. 그 결혼 전 1년이야말로
    신혼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사내 앞에서 더 감출 것이 없어진 여자만큼 가난한 심사가 또 있을까.
    하다못해,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경험이라도 가지고 결혼하는 여자는
    행복하다. 남편에게 주지 않은 자기만의 추억이라도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린 그녀는
    남편에게 모든 걸, 다 들켜 버렸다.
    그녀 자신도 몰랐던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과 교태까지 남편은 발견해서
    자기 것으로 가져 버렸고,
    그런 그녀로서는 결혼을 당연시 여겼다.
    자신의 전부를 아는 남자의 끔찍한 입을 봉해 버리는 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니체가 그랬던가,
    결혼은 성교의 가장 치사한 형식, 이라고.
    그녀의 경우엔 성교가 결혼으로 가게 되는 가장 치사한 형식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자신만의
    비밀이 생긴 거였다.
    그녀는
    며칠 간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양
    가슴 두근거리며 지냈다.
      
    하루, 또 하루가 지나자
    그러나 그녀는 조금씩 허탈해지기 시작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따금 속이 상하거나
    다시 쓸쓸해지면
    또 번지점프하러 갈까, 하는 미소가 돌기도 했지만
    그러나 혼자 하러 가는 번지점프말고는
    이렇다 할 스릴도
    모험도 없는 자신의 여생이, 그럴수록 측은해지는 거였다.
      
    그런 그때, 그녀에게로 엽서가 한 장 날아왔다.
    그녀의 딸 이름이 적혀 있었으므로 처음엔 유아원에서 보낸 줄 알았다.
    사진을 찾아가세요, 석. 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추신; 제가 유학을 떠나기 때문에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엽서를 식탁에 무심코 던져 놓다 말고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바로 번지점프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알게 된
    그 대학생 무리 중에, 사진기를 들고 있던 청년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가 굳이 그녀의 점프 순간을 사진 찍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이런 순간이 그녀에게 닥치리라
    예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그 엽서를
    받아들고 나자, 자신이 요 며칠 새 의기소침해진 까닭은
    혼자 번지점프하러 가는 것말고는
    이렇다 할 스릴도
    모험도 없는 자신의 인생이 측은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는 데서 연유했던 것임을
    그녀는 미소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프를 하고 내려오자
    그 청년의 친구들이 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면서
    ―유라 씨, 유라 씨는 석이한테 단단히 찍혔어요,
    저 녀석 굉장한 찍새죠.
    하고는 하, 하하, 모두들 웃었다.
    그녀도 후후, 오랜만에 꾸밈없이 웃었다.
      
    ―굉장한 찍새라니, 사진에 대해선 전문가인가 봐요? 물었더니,
    ―첫눈에 아름다움이 발견되면 사진은 잘 나오게 되어 있어요.
    유라 씨 사진은 아주 잘 나올 거 같아요.
    석이 서슴없이 대답했었다.
    남편에게 다 들켜 버린 줄 알았던 자신에게 아직도
    어떤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석이는 말하곤 스냅으로 몇 장 더
    그녀를 찍어댔다.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그의 셔터 소리는 그녀 심장을
    잘라내는 것도 같았고
    그녀의 영혼을
    가두는 쇠창살 소리 같기도 했었다. 찰칵…
      
    그녀는 문을 잠그고 생각했다. 어떡하지. 그녀의 심장이
    다시 두방망이질 쳐대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녀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마치 안전장치도 없는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창공에 혼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를 만나러 갈 것인가, 갈 것인가.
      
    가자, 하고 그녀는 단안을 내렸다. (아니, 이미
    며칠 전부터 내려져 있었다)
    만나러 가다니, 그를, 사랑하겠다는 것인가?
    플레이보이 기질이 농후해 보이는 그 청년을 사랑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남편의 따지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사랑하겠다니요,
    그는 곧 유학을 떠날 거예요, 그녀는 변명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녀와 그 사이의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어떤 강렬한 유혹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번지점프를 하러 갈 때처럼
    내복을 이것저것 입어 보았다. 그리고 가장 정숙한 것으로
    이번엔 골랐다.
    그리고 몇 번이나 베란다에 나가 다짐했다.
    그를 사랑해서는 안 돼! 그는
    곧 떠날 사람이야, 사랑하면 서로 괴롭기만 할 거야.
    단지, 그가 그녀를 먼저 유혹한다면
    모든 걸 들어주자.
    아니 그럴 바엔, 그녀가 먼저 허점을 보이는 자세로 그를 바라보자.
      
    어쩌면 그녀의 외로움보다도
    그의 외모보다도
    그녀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은, 그것이
    둘 사이의 마지막 기회, 라는 사실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몰랐다.
    미처 싹도 틔워 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둘 사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단 한 번뿐이라는 그, 간절함….
      
    어떤 이기적 계산도
    삿된 망설임도
    속된 욕심도 개입할 겨를 없이 사랑하고
    결별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녀를 조금은 더 대범하게 만들었는지
    몰랐다. 그녀는 만약을 위해서
    피임준비까지 했다.
      
    막상 옷을 차려입고 나가자니까 몸이 약간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결별이 보장된 젊은 미청년과의 단 한 번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모든 주부들의 감출 수 없는 바람이자
    로맨스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남편이 간혹 와이셔츠에 루주를 묻히고 와도 이제는
    겉으로만 화를 내리라, 싶었다.
    그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러나 그 석이라는 청년은 어떤 여자 친구와 함께 있었다.
    석이보다도 더 앳돼 보이고
    웃을 땐
    왕방울 같은 두 눈을 감쪽같이 감췄다가
    다시 내보이는 마술까지도 부릴 줄 아는 깜찍한 계집애였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석이에게서 어떤 신호를 감지하려고 애썼다.
    메뉴판을 내밀 때나
    그 여자애가 화장실 간 사이에
    어쩔 수 없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자든가, 그녀를 따돌릴 핑계를 찾자든가 하는,
    어떤 메시지를, 모종의
    눈짓을
    그가 그녀에게 보내지나 않을까,
    그녀는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커피만 달랑 시켜 마시고 둘은 떠났다.
    그녀 역시 마지막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과 악수하고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동시에 그가 주고 간 봉투에서 사진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그 안에 든 세 장의 사진보다도
    혹시 그가 다른 메시지라도 넣어 두지 않았을까 싶어
    봉투부터 흔들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세 장의 사진을 가로등 불빛에 비춰 보았다.
    첫 번째 것은 아마 점프하고 내려와서
    스냅으로 찍은 사진 같았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녀 눈가에 주름살이 새겨지는 것도 모른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두 번째 것은 그녀가 점프하고 나서
    줄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에
    줄에 매달려 있는 게 그녀 자신인지, 아니면 고릴라인지,
    소파 같은 짐짝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세 번째 것은, 바로 그녀가 점프하고 아래로 추락하는 바로 그 순간의 모습이었다.
    특수렌즈를 사용했는지 용케도 그녀의 얼굴 표정까지
    정확히 잡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 표정은 그녀 자신조차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를 보고는
    아연실색하는 표정 같기도 하고
    으하핫, 소리치며 환호작약하는 중인 것도 같고
    너무나 어이없어하는 것도 같았다. 혹은 무언가를 마구 삿대질하며
    따지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아무리 앉아 있어도 미련하기 짝이 없는 그놈은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다리가 저려 오는 바람에
    다시 주저앉다가 그녀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치께가 계단 난간에 부닥쳤는지 아프게 쑤셔 왔다.
    그녀는 마치 쓰리 당한 여자처럼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앉은 채로
    그녀는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만날 거면서 아름다움이니
    마지막 기회니 운운하면서
    사진을 굳이 등기로 보내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미친 자식!
    그녀는 죄 없는 그를
    욕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왜 자신의 눈에서는 또 청승맞게 눈물이 나는 것인지,
    그녀는 혼자말로 탄식하듯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건,
    강간당한 것보다 더 지독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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