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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젠킨스: 평양의 포로 (인디펜던트)
tempus_fugit
2006. 3. 8. 17:29
찰스 젠킨스: 평양의 포로
(Charles Jenkins: Prisoner of Pyongyang / 영국 The Independent, 3. 7, 28~29면 전면, David McNeil)
찰스 젠킨스씨는 1965년, 미군 기지를 떠나 북으로 탈영한 순간을 생애 최고의 실수로 묘사했다. 그 후 40년간 그는 매질을 당했고, 굶주렸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 이제 일본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그는 데이빗 맥닐 기자에게 흔치 않은 인터뷰를 허락했다.
40년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잊었을 정도로 고립되어 살았던 찰스 젠킨스씨가 일본에서 가장 외진 곳 중의 한 곳에서 현재 살고 있다는 것은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 감옥이었던 외딴 섬, 사도. 그는 이곳에서 그의 아내 히토미와 두 딸, 브린다와 미카와 함께 작은 집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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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6개월 4일간 냉전의 전리품으로 북한에서 생을 보내야 했던 젠킨스씨는 이제 66세의 나이로 굉장히 다른 삶에 다시 적응해야만 한다. “북한에 익숙해졌어요. 매일 얼굴을 맞는데, 그걸 예상하게 되죠. 더 이상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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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킨스씨의 흔치않은 인생은 스파이 소설처럼 들리며, 최고 드라마처럼 세 개의 뚜렷한 막으로 나뉘어 진다. 제 1막은 캐롤라이나 북쪽의 가난한 공동체에서 자라난 것이다. 여기서 젠킨스씨는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미군에 입대한다. 제 1막은 1965년 1월 어느 추운 겨울 밤, 술에 취하고 불행했던 젠킨스씨가 비무장지대의 부대를 탈영해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끝이 난다. 오늘날 젠킨스씨는 이러한 결정을 “최대의 실수”라고 말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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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죽(竹)의 장막 뒤에서 제 2막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는 매질을 당하고 굶주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빼앗겨 결국 ‘민형창’이 된다. 그는 결혼하게 된 일본 여인 히토미 사가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는 1978년 당시 19세에 어머니와 함께 평양의 스파이에 의해 납북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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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의 어머니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녀의 머리를 내려쳐 바다에 던졌다고 생각한다”고 젠킨스씨가 말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있다. 이들은 증인을 남기지 않는다.”<br />
이제 젠킨스씨는 지난 2002년 9월에 시작한 인생의 마지막 장으로 보이는 것에 있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 간의 정상회담의 결과로 세계는 이 ‘리프 밴 윙클’(역주: 美 작가 W. Irving의 소설 ‘The Sketch Book'의 주인공으로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잠만 자는 사람을 비유)같은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북한 정부가 젠킨스씨의 아내와 4명의 납북 일본인들을 돌려보냈을 때, 젠킨스씨는 두 딸과 함께 평양에 남게 되었다.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는 21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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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반이 냉전 라이벌 사이에서 좌지우지되는 삶을 산 후, 마침내 젠킨스씨와 그의 아내에게 2004년 7월 자카르타 공항에서 언론 앞에서 보인 키스로 상징화되는 자유가 주어졌다. “북한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키스를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나쁜 일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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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젠킨스씨는 일본정부의 5년간의 지원금과 일본에서 낸 자서전의 수익금으로 살고 있다. 이 책은 30만부 이상이 팔렸다. 인터뷰가 진행된 호텔에서 그는 북한 공작원들이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납치해 간 장소를 볼 수 있다. 아직도 비슷한 일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지는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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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병장출신인 젠킨스씨는 탈영으로 불명예 제대한 이후, 2004년 미군 교도소에서 25일간을 지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북한에 대한 정보와 맞교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해 거의 두 달간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심문을 당했다고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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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군시설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군시설의 위치를 다 알았다. 그들은 20년 이상 북한에 있던 간첩이 내가 준 정보의 10분의 1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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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간첩과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젠킨스씨는 평양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 근처에 산이 있었는데, 러시아가 거기에 미사일을 설치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거기에 올라가지도 이에 대해 얘기하지도 않았다. 미사일들은 모두 일본과 한국에 조준되어 있다.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전향했을 때, 이 모든 과학자들이 도망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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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북한에 미국인들이 더 많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있다는 것은 알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이들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남겨진 미군들이다. 미국인들이 농작을 하는 곳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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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1965년에 떠났던 나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내 생각에 미국이 북한에 90년대에 약속했던 발전소를 주지 않았을 때, 첫 번째 실수를 했다. 미국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다. 그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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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북한인들이 구식 러시아 발전소를 대체할 것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었으며, 물을 퍼내기 위한 전력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물을 얻기 위해, 10미터가 넘는 우물을 파야 했는데, 겨울에는 전력이 너무 약해서 그 물도 풀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물을 운반했는데, 정말 힘든 일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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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나를 북한의 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다치는 사람이었다. 지금 북한에서 다치는 사람들이 북한주민인 것처럼 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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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킨스씨는 심하게 군국화된 나라를 “모든 사람들이 군인인 나라”라고 묘사했다. 그는 북한주민들이 性 상대도 마음대로 고를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마음대로 말을 걸 수도, 다른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대해 술을 마실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김정일이 처음에 권력을 승계 받았을 때, 내가 살았던 곳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과학연구센터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교육받은 사람들, 의사, 교수들이었다. 이들은 파티를 가졌는데, 술을 마시면서 김정일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이를 밀고했고 그들 모두가 사라졌다. 이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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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5개에서 7개의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수용소는 가족 전체를 삼킨다. “한 사람의 친척을 모두 찾아서 그들도 같이 수용소에 보낸다. 한번은 왜 그렇게 하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친척들이 정부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에 다 같이 보내버린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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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아내가 ‘사도’시의 한 사무실에 일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집에서 혼자 미국 영화를 보면서 보낸다. 한 정보원은 “이들은 별도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사도시는 젠킨스씨가 영어를 가르치거나 투어가이드가 되기를 원하지만 젠킨스씨의 나이와 강학 억양은 어느 것이나 난제로 만들 것이다. 그는 7월에 일본시민권을 신청할 것이지만,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인정한다. 그는 “일어를 배워야만 한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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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은 금세 일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고 사도에 정착하고 있다. 미카는 올해 유치원선생님이 되기 위한 교육을 시작할 것이며, 브린다는 웨딩플래너가 되고 싶어 한다. 젠킨스씨는 지난 해 병든 노모를 방문하기 위해 미국에 방문했을 때, 딸들이 미국을 좋아했다고 말하지만, 미국으로 가는 것은 논외의 문제다. “미국으로 가면 일본에서 나쁘게 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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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도하지 못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는 이번에는 북한의 임의적인 요구에 의해 사로잡혀 있지는 않지만, 과거의 끈, 죽음 및 북한에서 죽어갈 그를 구해줬다고 믿는 나라에 대한 의무에 사로 잡혀 있는 셈이다. 그는 이제 막 운전하는 것을 배운 차로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항상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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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6개월 4일간 냉전의 전리품으로 북한에서 생을 보내야 했던 젠킨스씨는 이제 66세의 나이로 굉장히 다른 삶에 다시 적응해야만 한다. “북한에 익숙해졌어요. 매일 얼굴을 맞는데, 그걸 예상하게 되죠. 더 이상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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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킨스씨의 흔치않은 인생은 스파이 소설처럼 들리며, 최고 드라마처럼 세 개의 뚜렷한 막으로 나뉘어 진다. 제 1막은 캐롤라이나 북쪽의 가난한 공동체에서 자라난 것이다. 여기서 젠킨스씨는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미군에 입대한다. 제 1막은 1965년 1월 어느 추운 겨울 밤, 술에 취하고 불행했던 젠킨스씨가 비무장지대의 부대를 탈영해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끝이 난다. 오늘날 젠킨스씨는 이러한 결정을 “최대의 실수”라고 말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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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죽(竹)의 장막 뒤에서 제 2막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는 매질을 당하고 굶주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빼앗겨 결국 ‘민형창’이 된다. 그는 결혼하게 된 일본 여인 히토미 사가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는 1978년 당시 19세에 어머니와 함께 평양의 스파이에 의해 납북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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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의 어머니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녀의 머리를 내려쳐 바다에 던졌다고 생각한다”고 젠킨스씨가 말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있다. 이들은 증인을 남기지 않는다.”<br />
이제 젠킨스씨는 지난 2002년 9월에 시작한 인생의 마지막 장으로 보이는 것에 있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 간의 정상회담의 결과로 세계는 이 ‘리프 밴 윙클’(역주: 美 작가 W. Irving의 소설 ‘The Sketch Book'의 주인공으로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잠만 자는 사람을 비유)같은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북한 정부가 젠킨스씨의 아내와 4명의 납북 일본인들을 돌려보냈을 때, 젠킨스씨는 두 딸과 함께 평양에 남게 되었다.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는 21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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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반이 냉전 라이벌 사이에서 좌지우지되는 삶을 산 후, 마침내 젠킨스씨와 그의 아내에게 2004년 7월 자카르타 공항에서 언론 앞에서 보인 키스로 상징화되는 자유가 주어졌다. “북한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키스를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나쁜 일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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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젠킨스씨는 일본정부의 5년간의 지원금과 일본에서 낸 자서전의 수익금으로 살고 있다. 이 책은 30만부 이상이 팔렸다. 인터뷰가 진행된 호텔에서 그는 북한 공작원들이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납치해 간 장소를 볼 수 있다. 아직도 비슷한 일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지는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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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병장출신인 젠킨스씨는 탈영으로 불명예 제대한 이후, 2004년 미군 교도소에서 25일간을 지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북한에 대한 정보와 맞교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해 거의 두 달간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심문을 당했다고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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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간첩과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젠킨스씨는 평양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 근처에 산이 있었는데, 러시아가 거기에 미사일을 설치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거기에 올라가지도 이에 대해 얘기하지도 않았다. 미사일들은 모두 일본과 한국에 조준되어 있다.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전향했을 때, 이 모든 과학자들이 도망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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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북한에 미국인들이 더 많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있다는 것은 알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이들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남겨진 미군들이다. 미국인들이 농작을 하는 곳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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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1965년에 떠났던 나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내 생각에 미국이 북한에 90년대에 약속했던 발전소를 주지 않았을 때, 첫 번째 실수를 했다. 미국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다. 그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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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북한인들이 구식 러시아 발전소를 대체할 것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었으며, 물을 퍼내기 위한 전력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물을 얻기 위해, 10미터가 넘는 우물을 파야 했는데, 겨울에는 전력이 너무 약해서 그 물도 풀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물을 운반했는데, 정말 힘든 일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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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킨스씨는 심하게 군국화된 나라를 “모든 사람들이 군인인 나라”라고 묘사했다. 그는 북한주민들이 性 상대도 마음대로 고를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마음대로 말을 걸 수도, 다른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대해 술을 마실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김정일이 처음에 권력을 승계 받았을 때, 내가 살았던 곳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과학연구센터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교육받은 사람들, 의사, 교수들이었다. 이들은 파티를 가졌는데, 술을 마시면서 김정일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이를 밀고했고 그들 모두가 사라졌다. 이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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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5개에서 7개의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수용소는 가족 전체를 삼킨다. “한 사람의 친척을 모두 찾아서 그들도 같이 수용소에 보낸다. 한번은 왜 그렇게 하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친척들이 정부에 반대할 것이기 때문에 다 같이 보내버린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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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아내가 ‘사도’시의 한 사무실에 일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집에서 혼자 미국 영화를 보면서 보낸다. 한 정보원은 “이들은 별도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사도시는 젠킨스씨가 영어를 가르치거나 투어가이드가 되기를 원하지만 젠킨스씨의 나이와 강학 억양은 어느 것이나 난제로 만들 것이다. 그는 7월에 일본시민권을 신청할 것이지만,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인정한다. 그는 “일어를 배워야만 한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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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은 금세 일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고 사도에 정착하고 있다. 미카는 올해 유치원선생님이 되기 위한 교육을 시작할 것이며, 브린다는 웨딩플래너가 되고 싶어 한다. 젠킨스씨는 지난 해 병든 노모를 방문하기 위해 미국에 방문했을 때, 딸들이 미국을 좋아했다고 말하지만, 미국으로 가는 것은 논외의 문제다. “미국으로 가면 일본에서 나쁘게 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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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도하지 못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는 이번에는 북한의 임의적인 요구에 의해 사로잡혀 있지는 않지만, 과거의 끈, 죽음 및 북한에서 죽어갈 그를 구해줬다고 믿는 나라에 대한 의무에 사로 잡혀 있는 셈이다. 그는 이제 막 운전하는 것을 배운 차로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항상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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