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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세포를 둘러싼 과장, 너무 멀리 가버렸다(인디펜던트)

tempus_fugit 2005. 12. 29. 21:38
Mary Dejevsky

황우석 박사의 수치는 우리시대의 위대한 과학 반전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 서울대학교의 황 박사는 복제 및 줄기세포 관련 선구적 연구가 ‘가짜’로 드러난 이후, 지난 주 교수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그가 야기한 “충격과 낙담”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다.

“충격”과 “낙담”이라는 단어는 특히 잘 선택되었는데, 왜냐하면 이번 황우석 파동은 한국을 훨씬 넘어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황 박사의 전공은 현재 의학 연구에서 가장 유망한 분야가 아니라면, 그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이 분야는 가장 능력 있고 야심찬 젊은 과학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또한 수십억 달러의 보조금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리고 대중적 희망이라는 아낌없는 투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희망적 생각만이 의학의 추진력이었다면, 줄기세포는 복제된 배아에서 만들어져서, 환자들에게 투여되고 모든 종류의 지독한 질병을 이미 다 고쳤을 것이다.

황 박사의 연구에서 얼마만큼을 믿을 수 없는 지가 확립되기까지, 이 분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자신들의 연구를 지지하기 위해 황 교수의 흠 있는 연구결과를 인용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론을 다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줄기세포연구를 위한 보조금의 유입이 늦춰질 수 있다. 이는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줄기세포연구사회에 어둡고 불확실한 나날들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 분야를 재점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연구자들은 줄기세포의 잠재적인 유익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 왔고, 이제는 일반인들도 이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들이 줄기세포에 대해 너무 자주 이야기했기 때문에, 줄기세포가 ‘삶의 기초적 요소’가 되었고, 일부는 이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친척들과 친구들이 미래에는 너무 쉽게 고쳐질 수 있다고 하는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우리 같은 非과학자들이 어떻게 이를 의심하겠는가? 줄기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과장이 먼저 없어질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황 교수의 공개적 실수인정은 이 분야에서 유익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줄기세표연구 및 복제분야가 잠시 멈춰서 숙고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는 값비싼 실패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 분야의 성공이 가져올 수 있는 불확실한 영향력이다.

줄기세포 연구의 지지자들은 줄기세포연구가 현재는 치료 불가능한 질병들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그러나 줄기세포연구의 위대한 희망은 환자 맞춤형 세포를 이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치료’라는 단어는 ‘향상’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유전자치료’라는 단어는 반세기 이전, 관념적으로 추방되었던 단어, 바로 ‘우생학’으로 아주 쉽게 변한다.

유전적으로 ‘흠’이 있다는 것은 문화나 상황에 달려 있다. 태아에서 발견된 어떤 질병에 유전적으로 감염되기 쉬운 점이 치료나 낙태의 근거가 되는가? 그리고 보험료는 어떻게 책정되는가? 현재 보험사들은 유전자 테스트를 요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압박은 존재한다. 보험사들에게는 유전자 테스트가 상업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고, 이에 저항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로 인한 결과는 유전자 구성이 대규모의 그룹을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개인건강보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정치인들은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바람직한 특질은 어떠한가? 부모의 선택권 행사가 이미 얼마만큼 진보했는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인터넷에서 미국의 수정(受精)서비스를 몇 군데 훑어보기만 하면 된다. 생물학적 부모의 높은 IQ 지수, 스포츠 체격, 금발 및 푸른 눈동자라는 세부사항에 정확히 맞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 사회의 유전적 선호의 크기는 너무나 명백하다. 성감별은 이미 영국에서 태아이상을 조사하는 것처럼 일상이 될 수 있는 절차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줄기세포 선구자들과 복제치료 지지자들은 이들의 연구와 20세기 초 우생학 추구와의 관계를 무시하는데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세세히 구분하자면, 20세기 초의 탐구는 인류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현재의 연구는 개인을 하나씩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동일한 것이다. 이는 바로 맞지 않거나 맞도록 만들어질 수 없는 사람들의 축출, 악마化, 혹은 파괴이다.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없애버린 60년이나 된 금기는 ‘우생학’이 한 국가의 우월경향의 일부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 말살시켰는지 모르겠다. 한국인 교수의 수치가 과학자들과 非과학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잠시 멈춰서 생각하게 한다면, 그의 지나친 과학적 영위의 추구는 고맙고 유익한 효과를 가졌을 것이다.